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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 사창서당 社倉書堂 ‘사창(社倉)’이라는 명칭은 서당이 있는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서당이 있던 자리는 조선 중기 성주 지역의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49세 되던 해인 1591년(선조 24)에 서숙(書塾)을 지어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정구는 마을의 이름이 주자(朱子)가 경영하였던 숭안(崇安)의 사창과 동일함에 주목하여 서숙을 짓고, 「새로 지은 사창에 쓰다[題社倉新構]」라는 시를 지었다. 후 서숙은 퇴락하여 한강대(寒岡臺)라는 이름으로 터만 남아 있었는데, 정구 제자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창서당(社倉書堂)을 건립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미 - 성리학 역사관 구미의 학자의 기록관입니다. 구미 금오산에 있으며 구미 출생의 상세 기록과 역사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각각 요사채별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기록관에는 안내를 도와주는 해설가분도 계시고 구미와 고대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옥천 - 금강유원지 옥천군 금강유원지 입니다. 경부선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는데. 상, 하행선이 동시에 출입할 수 있도록 개방 되어있어요. 이곳 휴게소에서 강변을 바라보면 금강 상류가 흐르는데 경치가 뻬어나 옥천군에서 유원지로 지정하였습니다. 여름이면 낚시와 물놀이 다슬기 채취등 강변을 따라 쭉 가면 "옥천옻산업특구"로 조성하여 교육의 장으로 변모되어 있네요. 강변에는 캠핑이나 차박을 즐기는 사람들도 옵니다. 이 장소는 예전에 동네 형들이랑 낚시하러 여러번 가봤고 친구들이랑 수시로 여가를 보네려 가는 장소라 저에겐 특별한 곳이기도 해요. -청개구리- 밤마다 개골 개골 오늘 밤도 개골 개골 엄마가 죽기라도 했나 자식이 잘못 되기라도 했나 새끼 생각 남편 생각 농사일 생각 새벽까지 뒤척이는 나도 개골 개골 너도 개골 나도 개골 ..
김천 - 김산향교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2]김산향교는 조선 태조 1년(1392)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인조 12년(1634) 대성전과 명륜당을 다시 지었고 동재·서재, 동무·서무, 묘문(廟門) 등을 복원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그 당시에 지은 것이다.[2]제사지내는 공간인 5칸의 대성전과 동무,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7칸의 명륜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남아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2]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2]
김천 - 봉황대 김천시 연화지에있는봉황대.옛 선비들이 풍류와 시를 읊고모여 학문을 닦은 장소라합니다.봄에는 연못둘레에 벗꽃으로감싸 장관을 이루는 연화지.그안에 봉황대 입니다.조선시대에 이곳으로 옮겼다하네요.
김천 - 김호중 소리길 김호중 소리길고맙소 노래의 가수 김호중그가 어릴적 이 길을 다닐때크게 소리내며 다녔든 길 이라하여소리길 이라 지정.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고맙소.이나이 되서도 그래도당신을 만나서 고맙소고맙소 늘 사랑하오
대구 - 팔공산 파계사 804년(애장왕 5) 심지(心地)가 창건하고,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이 삼창하였다. 이 절에는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은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고,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淑嬪) 최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는 지방 유림(儒林)의 행패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御衣)는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현존 당우로 2층..
칠곡 - 가산산성 1971년 3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石城)으로, 내성은 1640년(인조 18), 외성은 1700년(숙종 26), 중성은 1741년(영조 17) 각각 완성하였고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성 안에 객사·인화관(人和館)을 비롯한 관아와 군관청·군기고·보루·포루(砲樓)·장대(將臺) 등이 설치된 점으로 보아 행정적 목적보다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한 것 같다.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는 조선 후기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칠곡 가산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