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인 것이다.
해인사 자료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인사는 균여(均如)대사, 대각(大覺)국사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실록을 보관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 숙종 21년(1695) :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 숙종 22년(1696) :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 영조 19년(1743) :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 영조 39년(1763) : 화재
- 정조 4년(1780) : 무설전 화재
- 순조 17년(1817) : 수백칸 당우 화재
- 고종 8년(1871) : 법성요 화재
조선왕족실록 <태조실록>5월 10일조의 기사에 보면, 태조가 용산강(龍山江)으로 친히 행차하여 강화 선원사로부터 대장경판을 운반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 다음날에는 비가 오는 가운데 2천 명의 군사로 하여금 지천사로 옮기되 오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력들이 독경하였다고 적고 있다.
대장경판을 옮기는 행렬 앞에는 향로를 든 동자와 함께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길을 열었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거나 지게에 이거나 머리에 이고 행렬을 이루어 나아갔을 것이다.
이 행렬은 서울 지천사에서 시작하여 장호원과 충주를 지나 조령 · 문경 · 점촌 · 구미를 통과하여 장경나루를 거쳐서 해인사 판전에 도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는 서울에서 한강에 배를 띄워 대장경판을 싣고 서해 바닷길을 통해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에 이르러, 그곳에 배를 대로 해인사까지 운반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개포마을의 이름도 ‘경을 풀었다’는 뜻에서 나온 ‘개경포(開經浦)’가 전화된 것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이 보안되어 있는 해인사 대장경판전은 같은 양식과 규모의 60간짜리 165평씩의 두 긴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판고로서,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 북쪽 건물은 법보전이라 부르는데, 경판을 보관하는 창고 기능을 위해 일체의 장식을 가하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전통 과학의 우수성이 독창적으로 발휘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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